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특별한 강의 (지혜로운 삶 / 성령과 신부)


인생을 지혜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지으신 창조주하나님께 듣는 강의는 단연 최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강의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성령과 신부에게 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주셨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과 신부이신 아버지하나님과 어머니하나님께 나아오셔서 최고의 삶의 선물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흔들리며 피는 꽃 (고난 / 힘내세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힘내세요!!!
우린 모두 할 수 있어요.^^

생명공학 (창조주 하나님의 영생 이식)

  무병장수, 만수무강은 인류의 공통된 염원이다. 그러나 이 염원은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학을 통해서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불치병과 난치병들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생명공학이다. 생명공학은 시험관 아기, 정자은행, 유전자 조작 농산물 등을 통해 인류의 삶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말 그대로 생명체의 기능을 조작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가 바로 생명공학이다. 전 세계 생명공학 분야의 과학자들은 불치병·난치병의 정복, 생명 연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다.

  1990년,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게놈(genome)이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로 ‘유전자 전체’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 프로젝트는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하여 게놈지도, 즉 생명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었다. 인류는 이 프로젝트로 인해 상당히 고무되었다. 생명의 설계도를 손에 쥐게 된다면 얼마든지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세계 18개국의 과학자들과 슈퍼컴퓨터가 동원된 가운데 10년에 걸쳐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2000년 6월에 그 결과가 발표됐다. 전 세계는 생명의 비밀이 베일을 벗었다며 흥분했다. 어떤 이는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그려진 유전자 지도를 ‘생명의 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과연 이것이 생명 연장의 열쇠가 될 것인가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내놓았고, 인간 복제 가능성을 제기하며 비판과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최초의 복제동물 ‘돌리’의 탄생으로 생명공학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나 250여 회의 실험 끝에 탄생한 돌리는 양의 평균 수명인 12년을 다하지 못하고 6년 만에 죽고 말았다. 실제로 돌리는 퇴행성관절염, 비만 등 조기노화로 의심되는 신체 이상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른 복제 동물들에게도 이와 같은 증상이 나타났는데 그 원인이나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낸 생명공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나도 많다. 이제 갓 생명에 눈을 뜨고 인식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생명공학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신다.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의 유전자 형태 중 일부를 밝힌 게놈 프로젝트를 엄청난 성과라고 하지만, 그토록 복잡하고 정교하고 오묘한 유전자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하나님께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한, 한마디로 신묘막측한 생명의 창조를 뛰어넘어 영생의 분야도 완성해놓으셨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이미 생명의 수한이 정해져 있다(시편 90:10).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디모데전서 6:16). 하나님께서는 당신만 갖고 계신 ‘영생’을 자녀들에게 이식시켜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까지 오셨다. 그리고 그 독보적이고 놀라운 생명공학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원리를 알려주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요한복음 6:54)

···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 하였더라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27)

  죄인 된 자녀들에게 아무런 부작용 없이 영생을 이식시켜주시고자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로써 죄를 사해주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허락해 주셨다. 결코 우리 인류로서는 알 수 없었던 유일한 영생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공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월절이 사라지고 말았다. 인류의 염원인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공학의 길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이후 인류는 오랜 시간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셔야 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시온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사야 25:6~9)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멜기세덱 그는 누구인가 (2편)

  멜기세덱이 살렘 나라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임을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했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던 사실도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그런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에 ‘누구의 아들’로 표기하지 않았던 이 부분, 이것에 감춰진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이런 이유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해석하기 어렵다고 했다. 멜기세덱은 예수님, 이렇게만 공식이 이뤄진다면 어려울 것이 없는 예언이지만 이렇게 해석되기에 예수님은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복음 1:1)

  요셉과 마리아라는 아버지, 어머니를 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아비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50)

  이 땅에 태어난 사람치고 아비나 어미가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아비도 어미도 없다는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을 가지지 않은,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라는 뜻이다. 이 예언대로라면 멜기세덱은 불신자의 가정에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초림 예수님은 아비, 어미인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가정이었다.

  또 족보도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 족보에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치고 이스라엘의 족보에 이름이 없을 수 없으므로 족보가 없으려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인이어야 한다.

  멜기세덱의 이 모든 조건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재림이 필연적이다. 성경의 예언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의 기록된 멜기세덱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심을 사도 바울은 9장에 이어 기록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28)

  멜기세덱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오시는 재림 예수님 그는 바로 생명의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이시다. 멜기세덱처럼, 초림 예수님처럼 떡과 포도주로 영생의 축복을 주신 재림 멜기세덱 그는 과연 누구인가.



출처 : 패스티브

멜기세덱 그는 누구인가 (1편)

성경의 인물 중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기도 하다.
멜기세덱이 그중 한 사람이다.
과연 멜기세덱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일까.



  성서에서는 어떤 인물에 대해 설명할 때 대부분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아들’로 말한다. 예를 들어 요나의 경우도 이렇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 1:1)

  그런데 성경에는 누구의 아들인지 또는 누구의 자손인지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럴 때면 그 인물에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바로 ‘멜기세덱’이 그중 한 사람이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고대시대에는 제사장과 왕을 한 사람이 겸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으로 있으면서 제사장도 겸직했다. 그는 아브라함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복한 인물이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7~20)

  멜기세덱이 특별한 이유가 여기 있다. 왕으로 제사장을 겸직한 것도 평범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시대 떡과 포도주로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없는 일이다. 과연 멜기세덱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 내용은 1,500여 년이 지난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 나와 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5:8~10)

  멜기세덱은 바로 예수님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왕이시다. 이와 함께 구원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다윗은 훗날 오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이렇게 전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시편110:4~5)

  멜기세덱이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떡과 포도주로 죄사함의 축복을 주신 것, 이 또한 멜기세덱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 26~28)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열과 같은 대제사장이심을 설명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5:8~10)

  그렇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멜기세덱은 분명 예수님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를 통해 멜기세덱에 대해 언급하며 예수님과 연관지었다. 둘의 관계가 예언과 성취에 놓여 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거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구절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서 5:11~12)

  사도 바울은 멜기세덱에 관하여 할 말이 많았던 부분을 앞서 설명해 놓고 왜 바로 이어 해석하기 어렵다고 했을까. 과연 멜기세덱에 대해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7장에서 그 부분에 대해 말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브리서 7:1~3)


2편에 계속됩니다.^^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할례 받지 못한 귀 ( 침례의 중요성)

아는가. 할례 받지 못한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예레미야 6:10)

도대체 할례가 어떤 예식이길래,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한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 구원과 직결된 가르침인 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구약 당시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었다(창세기 17:10). 할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태어나면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셨다.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창세기 21:4)

이러한 할례를 예수님께서는 침례로써 완성시켜주셨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할례가 ‘침례’인 것이다. 예수님 역시, 할례인 침례를 먼저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침례를 받아야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이러한 명령에 따라 사도 바울과 베드로, 빌립 등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즉시 침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후 자세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도록 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행전 16:13~15)

이처럼 침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받는 중요한 예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예식을 나중으로 미루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를 6개월이나 1년간 잘 다니거나 시험을 합격한 신자에 한해 주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사람을 놓고 1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이는 마치 청각장애자에게 듣기 시험에서 합격을 한 자에 한해 보청기를 주겠다는 것과 같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할례인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할례 받지 못한 귀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다.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9월 4일 목요일

편안과 평안 (진정한 평안 유월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의 몸은 불편한 것보다는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와 선지자는 일순간의 안일과 편안보다는 역경과 고난 뒤에 도래될 참된 ‘평안’을 내다보고 그것을 준비했다.

‘편안’과 ‘평안’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나 실상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편안은 외부환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상태지만,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푹신한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면 결단코 평안한 상태가 될 수 없다. 반면 힘든 가사노동이나 직장일로 몸은 고되지만 그 사람에게 뚜렷한 꿈과 소망이 있어, 마음만은 평안하다면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성경은, 육체의 편안과 마음의 평안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을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누가복음 10:5)

세상에는 여러 인사말이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습니까’.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여러 인사말들 가운데 최고의 인사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바로 이웃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평안을 누리도록 깨우치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21)

우리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명예나 지위나 부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며 하나님과의 유대를 중요시 여겼다(로마서 8:5~6).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과 평안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것은 무엇일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한복음 6:47~48)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예수님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생명을 위해, 유월절을 허락하셨다. 곧 유월절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요, 더불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영생의 축복까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돈 많고 부자로 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오복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마음엔 천석꾼, 만석꾼처럼 걱정이 가득하다면, 100세도 누리지 못하고 질병과 고통으로 육신이 소멸된다면, 과연 그들을 잘 사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근본 영혼의 평안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한시적인 삶으로 막을 내린다면 그것은 잘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고 해서 슬퍼하고만 있지 말고 ‘유월절’을 지켜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출처 : 패스티브

강제개종, 이단상담소를 찾는다??

결국 하산은 어머니를 죽였다. 이 반인륜적인 행위를 끝으로, 그동안 하산이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생활과 갈등은 순식간에 해소됐다.

하산의 어머니 에스메는 처녀 시절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그런 에스메에게 반해 할릴(하산의 아버지)은 여러 번 청혼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 압바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릴은 결국, 그녀를 납치해 자신의 아내를 삼아버렸다. 에스메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그러던 중 아들 하산이 태어났고 이후 가정생활을 충실히 해나갔다. 그녀에게 아들 하산은 삶의 마지막 희망이자 행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스메에게 압바스가 찾아왔다. 이를 알게 된 할릴은 압바스와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결국 둘 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가족들은 에스메에게 스스로 죽을 것을 종용했다. 동시에 할머니와 삼촌들, 마을 사람들까지 아들 하산에게 "너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 에스메를 죽이고 가족의 명예를 되찾으라"고 끈질기게 강요했다. 하산은 결국, 어머니 에스메를 죽였다.

터키 작가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행되는 명예살인의 폐단을 꼬집고 있다. 명예살인이란 이슬람 문화권에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해당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악습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다른 문화권이나 집안에서 반대하는 이성과 교제를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어길 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슬람교 배교나 타 종교로 개종을 하는 것도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상 타 종교로의 개종은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의 17세 소녀 파라는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가족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부모는 딸의 개종 사실을 알게 된 후 정신과 약을 복용하게 하고 매일 코란을 읽게 하는 등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그리고 결국 ‘집안의 명예를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딸을 죽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으로 독일로 피신했던 압둘 라흐만도 기독교로 개종한 후 지옥의 문턱에 다녀와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미국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샤리아에 근간을 두고 헌법을 제정했다. 전쟁 종식 후 본국으로 귀국한 라흐만은 이슬람을 배교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부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의 민주화를 강조하면서 라흐만의 석방을 호소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법무장관은 라흐만이 정신적 문제로 인해 재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법원에 석방을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법을 피해 라흐만을 석방시키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슬람에서 종교상 인권은 없다. 유엔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개종문제를 포함해 명예살인으로 매년 500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한다. 명예살인은 종교적 신념으로 위장한 명백한 살인행위다. 그러나 그에 따른 처벌은 아예 없거나 6개월 수감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런 미개한 행위가 헌법으로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믿겠는가. 개종을 위해 감금을 하고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멀쩡한 사람에게 정신과 약을 먹이고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자신들의 교리책을 던져주며 외우라고 강요한다.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은 죽어 마땅한 자로 만드는 이단세미나를 열고, 가족들을 충동질해 가족 일원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조장한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자행하면서도 그들은 위풍당당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단상담소를 운영하거나 이단상담전문가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는 종교브로커들이다. 이슬람권의 명예살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정당한 동기나 목적, 이유가 없다. 단지 자신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간다는 이유로 이 같은 악랄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케말의 소설에는 독사의 정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제목처럼 아직 독사는 살아있다. 이슬람권에도, 이 대한민국에도 말이다.

2014년 9월 3일 수요일

고기 먹는 흙보살 (제사음식)

  몇 일 지나면 민족 대명절인 추석인데요, 많은 가정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죠. 그런데 죽은 사람의 영혼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정말 가정에 복을 줄까요??
귀신은 사람에게 손을 댈 수도 없는데 어떻게 복을 주거나 화를 줄 수 있을까요??
만약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왕이면 인류의 조상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어 더 큰 복을 받는게 낫지 않을까요??
아래 글은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엔 무엇이든 의지하려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담고 있습니다. 정말로 복을 구한다면 참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구해야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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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홀아버지와 젊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후 연이어 딸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흙으로 만든 보살 몇 개를 사가지고 와서 상에 올려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보살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자신과 아들을 지켜달라고 빌었다.
가난한 형편에도 아버지는 보살 앞에 항상 풍성한 음식을 차려놓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 같은 행동이 못마땅해 여러 차례 보살을 치우라고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외출을 하면서 아들에게 고기를 삶아 보살 앞에 올려놓으라고 시켰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투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시킨 대로 고기를 삶아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가만히 흙보살을 바라보던 아들은 갑자기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흙보살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 박살을 내버렸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흙보살들을 발견하고는 아들을 소리쳐 불렀다.
“누, 누가 이 보살들을 깨버렸냐?”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 고기를 삶아 제단 위에 올려놓았는데, 글쎄 이 보살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서로 고기를 먹으려고 치고받고 싸우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박살이 나고 만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아들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이 녀석이 허튼소리를 하고 있어. 이 보살들은 흙으로 만든 건데 어떻게 고기를 먹고 어떻게 싸움을 한단 말이냐!”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이것들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기를 못 먹는데, 아버지는 왜 먹으라는 듯이 고기를 차려놓죠? 흙으로 만들어진 보살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들의 말에 말문이 막힌 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14년 8월 28일 목요일

천국은 착한 사람들의 것? (이순신, 안중근)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냐”고 묻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성경에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복음 5:29).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를 구한 위인, 즉 선한 사람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그와 반대로 적군의 수장이며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국자이며 의인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테러리스트, 자국의 지도자를 죽인 원흉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대한 심판은 누가 해야 옳을까요. 한국 사람이 해야 할까요, 일본 사람이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일입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하다면 선과 악의 기준도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과연 그 선과 악의 기준이 사람들의 기준과 비슷할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내가 생각하기에 선이면 하나님도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하실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옳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이라고 하시면 그것은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영혼 구원을 위한 죄 사함의 길에 서는 것이요, 죄 사함의 길을 가로막거나 그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 악입니다.


사람 중에는 인간적으로 착한 사람도 있고 못된 사람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내 기준에 착한 사람이 천국에 가야 한다는 주장은 바꾸어 말하면 내 기준에 미달인 사람은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조금 양심적이지 못하고 비뚤어진 사람이라도 용서하시고 천국에 데려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적으로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베드로후서 3:9).


제가 보기에는 “착한 사람이 무조건 천국에 가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신 하나님이 훨씬 자애롭고 인자해 보이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내가 못 푸는 수학문제 (하나님은 계시는가/영혼은 존재하는가)



세상에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이해를 못하거나 풀 수 없는 문제를 누군가는 쉽게 이해하고 풀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우스의 정17각형작도법, 아르키메데스의 원주율,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아무리 들어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수학문제입니다.

내가 이러한 수학문제를 풀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 수학이론들이 엉터리는 아닙니다. 도리어 매우 정확하고 치밀한 이론들이 분명합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며 거짓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세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안과 사람의 지능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며 영혼의 눈과 마음으로만이 이해가 가능합니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에 대해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데 대해 “하나님은 왜 ○○하지 않고 ○○하셨는가?” 하고 묻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하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보여드리면 정작 자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 그것이 거짓인 것입니까? 이는 내가 풀 수 없는 수학문제는 문제 자체가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한복음 3:12)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의 과학이 모든 것을 증명할 만큼 완전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류의 오판은 지난 과거에도 수차례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일례로, 성경은 이미 3500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허공에 매달아 놓으셨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욥기 26:7). 그러나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지구는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가 이 사실을 설명하자 말도 안 된다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오판과 몰이해는 헛웃음을 나오게 할 만큼 보기에 거북한 것이었습니다.

우주에 대해 현재 인간의 사고와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우주의 4% 정도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96% 이상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96%의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우주의 창조자도 아니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완전한 지식에 이른 존재도 아닙니다. 이 사실을 먼저 시인하고,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인지한다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니 그것은 거짓”이라는 오만한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하나님의 말씀이 쏙쏙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과학도 틀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해보라는 말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사실로 진실을 덮으려는 행위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본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허락해주시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놀라운 영혼 세계가 눈 앞에 보일 것입니다.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8월 21일 목요일

하나님의 교회가 성경을 보는 이유 (이단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씀하셨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로마서에는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입으로 주여 주여 하고 시인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어느 말씀이 맞는 것일까? 당연히 둘 다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 새 언약 복음으로 진리 교회를 세우셨을 당시에는 진리도 하나고, 가르침도 하나며, 예수님을 믿는 교회도 하나뿐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하고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유일한 진리 교회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예수님 승천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마귀가 심은 불법의 씨앗과 다른 복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드로와 바울은 진리의 도를 훼방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따르면 저주와 멸망을 당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이단, 다른 복음으로 불리는 가짜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진리와 가짜를 분별하는 분별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짜를 분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는 불법자들이 바로 멸망받을 가짜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가짜는 성경을 통해 진리를 분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지은 말과 거짓말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며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고 한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시도조차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면서도 나름 이단이라는 것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안식일, 유월절을 비롯한 새 언약 복음을 모두 버리고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합리화하면서, 자신들의 교리와 다른 교단은 모두 이단이라고 매도한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진짜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오직 하나의 진리, 오직 하나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오직 하나의 교회다. 이것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출처 : 패스티브(진짜와 가짜)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왕궁도 여관이다(하늘 본향, 영혼)

어느 수행자가 왕에게 초대되어 하룻밤을 왕궁에 머물게 되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수행자가 왕에게 말했다.
“왕이여, 이 여관은 굉장히 크군요.”
왕은 여관이라는 말에 기분이 나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곳은 왕궁이지 여관이 아닙니다.”
그러자 수행자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이전에 이 왕궁은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내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내 아버지의 아버지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것이었습니다.”
이에 수행자가 말했다.
“보십시오. 왕께서 말씀하신 대로 벌써 세 분이 이 여관에 묵고 가셨습니다. 단지 이 여관은 보통 여관과는 달리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칠팔십 년 정도, 좀 길게 묵고 가는 것이 약간 다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행자의 말에 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히브리서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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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여관에서 지낸다면 그 지내는 동안은 당연히 기쁘고 편안하겠지요.
하지만 나의 집이 왕궁보다 더 좋다면 그 즐거움과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여관이라 한다면
이 삶의 끝엔 영혼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일, 몇 년이 아닌 영원한 영혼 세계에서 왕궁같은 멋진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본향을 사모하며 오늘도 감사함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 3편 (바른 성경해석)

2편에서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다윗의 뿌리는 오직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3편에서는 영원한 언약은 무엇을 가르키는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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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만찬
성경에서는 유월절로 기록되어있다



이 장면은 유월절 성만찬 자리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떡을 일컬어 ‘당신의 몸’, 포도주를 일컬어 ‘당신의 피’라고 하시며 이를 보다 확실하게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반드시, 꼭, 확실하게 죄를 사해주시고 이로써 구원을 주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와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며 누가는 ‘새 언약’이라고 기록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따라서 영원한 언약은 예수님께서 피로 세워주신 유월절 새 언약이다. 다윗이 가지고 올 확실한 증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말일에 새 언약 유월절을 가지고 나타나신 분은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보았던 다윗의 뿌리가 된다. 다윗의 뿌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 만약 다윗의 뿌리가 아니면서, 즉 새 언약 유월절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서 성경을 해석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16)



다윗의 뿌리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성경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라야 올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진리 교회다. 이러한 성경의 예언따라 새언약 유월절을 회복해주신 분은 전 세계에서 오직 안상홍님 밖에 없다. 안상홍님은 성경이 증거하는 재림 예수님이시며 안상홍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가 오직 구원에 이르는 바른 성경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인 성경을 바로 살피고자 하시는 분이라면 꼭 하나님의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8월 18일 월요일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 2편 (바른 성경해석)

1편에서는 구원 받기 위해서는 다윗의 뿌리를 만나야함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2편에서는 다윗의 뿌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 다윗의 증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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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6)



성경의 모든 비밀을 올바로 해석해주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다윗의 뿌리는 바로 ‘예수님’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 다윗의 뿌리는 과연 ‘초림 예수님’일까 ‘재림 예수님’일까. 물론, 요한계시록은 이미 초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 쓰여졌기 때문에 초림에 대한 예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더욱 확실한 해답은 ‘인봉’이라는 단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예언은 초림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구원의 말씀이 인봉된 후 다시 개봉할 역사에 대한 예언인 고로, 다윗의 뿌리는 재림 예수님이다. 그런데 초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도 함께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3, 24)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다윗의 뿌리인 재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다윗의 뿌리만이 가지고 오는 ‘확실한 증표’로 해결된다.



마패 : 암행어사를 알아볼 수 있는 증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사야 55:3)



다윗에게만 주신 확실한 은혜는 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언약’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뿌리인 재림 예수님은 반드시 영원한 언약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원한 언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옛 언약이 아니다. AD 80년경 쓰인 ‘히브리서’는 이 영원한 언약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브리서 13:20)



히브리서는 ‘영원한 언약’에 대해 논하며 ‘’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영원한 언약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가 내재돼 있어야 함을 뜻한다. 때로는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하며 변치 않겠다는 의지로 ‘혈서’를 쓰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시며 피로써 절대 변치 않는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셨다. 한정적이고 유한하지 않은, 무한하고 영원한 ‘언약의 피’는 무엇일까.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7월 9일 수요일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 1편 (바른 성경해석)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 1편


  성경은 가장 오랫동안 인류에게 읽혀온 스테디셀러(Steady Seller)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6,500개의 언어 가운데 성경은 약 2,50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언어로 번역되면서 세상에는 수많은 교파들과 수많은 교회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 교리를 ‘진리’로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 많은 교회 중 어느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오직 ‘다윗의 뿌리’만이 성경을 올바 로 해석해주실 수 있다고 기록한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1~5)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인봉된 성경의 비밀을 개봉해주시는 ‘다윗의 뿌리’에 대해 언급했다. 예언 가운데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오른손에 가지신 책’은 당연 성경이다. 그런데 이 계시 속에서 요한은 성경이 어느 누구도 펴거나 보거나 할 수 없도록 ‘인봉’돼 있다고 말했다. 성경의 비밀을 아무도 볼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크게 울었던 요한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다윗의 뿌리’만이 인봉된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성경의 비밀은 유명한 목사도, 신학자도 아닌 오직 ‘다윗의 뿌리’만이 풀 수 있다. 즉, 우리는 ‘다윗의 뿌리’가 세운 교회에 가야 성경을 올바르게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지막 때 다윗을 구하고 경외하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세아 3:5)


  말일(末日)에, 즉 마지막 때에 다윗을 경외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의 은총으로 다가갈 수 없기에 이 시대 우리는 반드시 다윗의 뿌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