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2일 금요일

할례 받지 못한 귀 ( 침례의 중요성)

아는가. 할례 받지 못한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예레미야 6:10)

도대체 할례가 어떤 예식이길래,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한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 구원과 직결된 가르침인 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구약 당시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었다(창세기 17:10). 할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태어나면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셨다.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창세기 21:4)

이러한 할례를 예수님께서는 침례로써 완성시켜주셨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골로새서 2:11~12)

그리스도의 할례가 ‘침례’인 것이다. 예수님 역시, 할례인 침례를 먼저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침례를 받아야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이러한 명령에 따라 사도 바울과 베드로, 빌립 등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즉시 침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후 자세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도록 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행전 16:13~15)

이처럼 침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받는 중요한 예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예식을 나중으로 미루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를 6개월이나 1년간 잘 다니거나 시험을 합격한 신자에 한해 주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사람을 놓고 1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이는 마치 청각장애자에게 듣기 시험에서 합격을 한 자에 한해 보청기를 주겠다는 것과 같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할례인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할례 받지 못한 귀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다.

출처 : 패스티브

2014년 9월 4일 목요일

편안과 평안 (진정한 평안 유월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의 몸은 불편한 것보다는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와 선지자는 일순간의 안일과 편안보다는 역경과 고난 뒤에 도래될 참된 ‘평안’을 내다보고 그것을 준비했다.

‘편안’과 ‘평안’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나 실상 그 의미가 매우 다르다. 편안은 외부환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상태지만,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푹신한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면 결단코 평안한 상태가 될 수 없다. 반면 힘든 가사노동이나 직장일로 몸은 고되지만 그 사람에게 뚜렷한 꿈과 소망이 있어, 마음만은 평안하다면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성경은, 육체의 편안과 마음의 평안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을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누가복음 10:5)

세상에는 여러 인사말이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습니까’.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여러 인사말들 가운데 최고의 인사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바로 이웃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평안을 누리도록 깨우치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21)

우리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명예나 지위나 부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며 하나님과의 유대를 중요시 여겼다(로마서 8:5~6).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과 평안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것은 무엇일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한복음 6:47~48)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예수님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생명을 위해, 유월절을 허락하셨다. 곧 유월절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요, 더불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영생의 축복까지 덤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돈 많고 부자로 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오복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마음엔 천석꾼, 만석꾼처럼 걱정이 가득하다면, 100세도 누리지 못하고 질병과 고통으로 육신이 소멸된다면, 과연 그들을 잘 사는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근본 영혼의 평안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한시적인 삶으로 막을 내린다면 그것은 잘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고 해서 슬퍼하고만 있지 말고 ‘유월절’을 지켜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출처 : 패스티브

강제개종, 이단상담소를 찾는다??

결국 하산은 어머니를 죽였다. 이 반인륜적인 행위를 끝으로, 그동안 하산이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생활과 갈등은 순식간에 해소됐다.

하산의 어머니 에스메는 처녀 시절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그런 에스메에게 반해 할릴(하산의 아버지)은 여러 번 청혼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 압바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릴은 결국, 그녀를 납치해 자신의 아내를 삼아버렸다. 에스메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그러던 중 아들 하산이 태어났고 이후 가정생활을 충실히 해나갔다. 그녀에게 아들 하산은 삶의 마지막 희망이자 행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스메에게 압바스가 찾아왔다. 이를 알게 된 할릴은 압바스와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결국 둘 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가족들은 에스메에게 스스로 죽을 것을 종용했다. 동시에 할머니와 삼촌들, 마을 사람들까지 아들 하산에게 "너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 에스메를 죽이고 가족의 명예를 되찾으라"고 끈질기게 강요했다. 하산은 결국, 어머니 에스메를 죽였다.

터키 작가 야샤르 케말의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행되는 명예살인의 폐단을 꼬집고 있다. 명예살인이란 이슬람 문화권에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해당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악습이다. 특히 여성의 경우 다른 문화권이나 집안에서 반대하는 이성과 교제를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어길 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슬람교 배교나 타 종교로 개종을 하는 것도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상 타 종교로의 개종은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의 17세 소녀 파라는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가족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부모는 딸의 개종 사실을 알게 된 후 정신과 약을 복용하게 하고 매일 코란을 읽게 하는 등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그리고 결국 ‘집안의 명예를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딸을 죽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으로 독일로 피신했던 압둘 라흐만도 기독교로 개종한 후 지옥의 문턱에 다녀와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미국에 의해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샤리아에 근간을 두고 헌법을 제정했다. 전쟁 종식 후 본국으로 귀국한 라흐만은 이슬람을 배교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부시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의 민주화를 강조하면서 라흐만의 석방을 호소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법무장관은 라흐만이 정신적 문제로 인해 재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법원에 석방을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법을 피해 라흐만을 석방시키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슬람에서 종교상 인권은 없다. 유엔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개종문제를 포함해 명예살인으로 매년 5000여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한다. 명예살인은 종교적 신념으로 위장한 명백한 살인행위다. 그러나 그에 따른 처벌은 아예 없거나 6개월 수감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런 미개한 행위가 헌법으로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믿겠는가. 개종을 위해 감금을 하고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멀쩡한 사람에게 정신과 약을 먹이고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자신들의 교리책을 던져주며 외우라고 강요한다.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은 죽어 마땅한 자로 만드는 이단세미나를 열고, 가족들을 충동질해 가족 일원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조장한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자행하면서도 그들은 위풍당당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단상담소를 운영하거나 이단상담전문가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는 종교브로커들이다. 이슬람권의 명예살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정당한 동기나 목적, 이유가 없다. 단지 자신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간다는 이유로 이 같은 악랄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케말의 소설에는 독사의 정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제목처럼 아직 독사는 살아있다. 이슬람권에도, 이 대한민국에도 말이다.

2014년 9월 3일 수요일

고기 먹는 흙보살 (제사음식)

  몇 일 지나면 민족 대명절인 추석인데요, 많은 가정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죠. 그런데 죽은 사람의 영혼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정말 가정에 복을 줄까요??
귀신은 사람에게 손을 댈 수도 없는데 어떻게 복을 주거나 화를 줄 수 있을까요??
만약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왕이면 인류의 조상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어 더 큰 복을 받는게 낫지 않을까요??
아래 글은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엔 무엇이든 의지하려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담고 있습니다. 정말로 복을 구한다면 참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구해야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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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홀아버지와 젊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후 연이어 딸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흙으로 만든 보살 몇 개를 사가지고 와서 상에 올려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보살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며 자신과 아들을 지켜달라고 빌었다.
가난한 형편에도 아버지는 보살 앞에 항상 풍성한 음식을 차려놓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 같은 행동이 못마땅해 여러 차례 보살을 치우라고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외출을 하면서 아들에게 고기를 삶아 보살 앞에 올려놓으라고 시켰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투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시킨 대로 고기를 삶아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가만히 흙보살을 바라보던 아들은 갑자기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흙보살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 박살을 내버렸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흙보살들을 발견하고는 아들을 소리쳐 불렀다.
“누, 누가 이 보살들을 깨버렸냐?”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 고기를 삶아 제단 위에 올려놓았는데, 글쎄 이 보살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서로 고기를 먹으려고 치고받고 싸우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박살이 나고 만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아들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이 녀석이 허튼소리를 하고 있어. 이 보살들은 흙으로 만든 건데 어떻게 고기를 먹고 어떻게 싸움을 한단 말이냐!”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이것들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기를 못 먹는데, 아버지는 왜 먹으라는 듯이 고기를 차려놓죠? 흙으로 만들어진 보살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들의 말에 말문이 막힌 아버지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